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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비전. 그 발자취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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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성훈
조회 2,105회 작성일 16-06-2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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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스안에 앉아 고요히 사색에 잠기고 있었음에도, 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 민성훈
내가 저번주 토요일날 이루어진 여행에서 돌아오며 버스 안에서 생각한 글귀이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런 말이 그들의 생각과 맞지않아 가식적으로나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2016년 6월 18일. 나는 내가 이 곳에서 배운게 진정으로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4주차 캠페인인 현장체험학습을 위한 버스에 올랐다. 첫번째에는 김대중과 인권, 두번째에는 글쓰기와 세계, 세번째에는 창의력과 시간. 그리고 오늘, 나는 알아갈게 무엇일까 기대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후 5시간정도 달렸을까, 이윽고 우리는 체험학습의 첫번째 도착지인 김대중도서관에 도달했다. 처음에는 '왜 이런것이 김대중을 더욱 기려야할 전라남도에 있지 않고 서울에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곳에 계시던 안내원께서 '이 옆이 바로 김대중대통령의 자택입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을때, 나는 '아, 그분의 자택이 있는 곳이니 충분히 이곳에 지을 이유가 있겠다.' 라고 깨달았다. 안내원의 설명이 끝난후 우리들은 찬찬히 그곳을 둘러보았는데,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다잡게 하는 글귀를 발견했지만, 이건 끝에 말씀드리겠다. 두번째로 우리가 도착한곳은 바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였다. 실제 형무소를 개조하여 만든곳이라 하여 더욱 기대가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곳은 역시 짐작한대로 살벌한곳이였다. 이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곳은 형무소라기 보다는 지옥이였다는 것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의 모든 정책이나 행동들이 우리 조선에게 지옥같은게 아니였던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구체적으로 좁은 옥사. 특히 독방은 '먹방', '검을 먹'을 써서 검은방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격벽장'이라고, 서양 철학자의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의 형태를 띈 운동시설이 존재했는데, 이건 사람이 쓸 수 있나 싶었다. 그리고 관람 도중에 영상관을 들러 형무소의 자세한 내력을 보았는데, 세상에. 하루종일 일이다. 하루종일. 아침에 일어나서 대충 몸 다듬고 현재 우리가 잠자거나 공부할 때, 혹은 쉬는시간에. 그들은 그냥 일만했다는 것이다. 충격 그 자체였다. 대체 왜 일본은 이런 짓까지 해야했던것일까? 후우, 아픔과 탄식을 뒤로 한채,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인 청와대 사랑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글쎄. 이 말을 전해 미안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다지 깨달은게 없었다. 단지 알아낸것이라면 내가 가져온 주간지 '공감' 정도? 다시 한 번 이 말을 전해 미안하지만 이걸 보고 다음에 있을 평화비전스쿨의 밑거름으로 써 주길 바란다. 다시 돌아와서, 사랑채 구경이 끝난 후, 우리는 목포로 돌아가는, 또한 내가 서두에 언급했던 생각을 떠올린 버스에 올랐다. 끝으로, 내가 이 체험에서 느낀점은 김대중도서관에서 보았던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가장 강한자는,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불의에 분노로 대응하지 않고, 평화롭게 대응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몸에 익히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내 꿈이 정치가인만큼, 나는 김대중대통령님의 말씀을 내 가슴에 깊이 새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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